독서력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 자제력의 역설, 기억의 덫에 빠진 인간

돈생휴미 2025. 6. 1. 08:37

강박사고, 억제의 역설 그리고 인간의 딜레마

흰곰을 잊어야 하는데, 텅 빈 방 안은 흰곰으로 꽉 차 있다.
홀로 누운 천장 위에서 춤을 추고,
열 맞춰 널어놓은 빨래다이에 축 늘어져 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생각.
이를 다니엘 웨그너는 “흰곰 효과(White Bear Effect)”라 불렀다.


"흰곰을 떠올리지 마세요"라고 했을 때, 우리는 곧장 흰곰을 떠올리고 만다.
억제는 역설을 낳는다. 억누를수록 더 폭발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며, 기억이며, 감정이다.

바우마이스터는 말한다.
의지력은 에너지 자원이며, 고갈될 수 있는 정신의 체력이라고.
누군가를 '잊으려는 의지'는 단순한 마음먹기가 아니다.
정신적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모하며,
자제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자아를 탈진시켜 더 깊은 강박의 늪에 빠뜨린다.

이런 역설은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것들’을 마주할 때,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잊기’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며, 때로는 운명의 문제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 비극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와 결단력의 허상

트로이 전쟁이 7년째 접어들면서, 트로이의 젊은 전사 트로일로스는 크레시다와 사랑에 빠진다. 둘은 서로의 사랑을 맹세한다.


하지만 곧 크레시다는 그리스 측에 인질로 보내진다. 트로일로스는 그녀의 결단과 정조를 믿고, 기다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크레시다는 그리스 진영에서 곧 다른 전사 디오메데스의 유혹에 빠진다. 트로일로스는 멀리서 이를 지켜보며, 사랑과 신념, 결단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절감한다.


셰익스피어는 말한다.
‘결단력’이란 결국 상황과 시간 앞에 무력해지는, 일시적인 착각일 뿐이라고.

즉, "잊지 않겠다"는 결단 역시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기억을 지키려 애쓰지만, 어느 순간 그 결단마저 희미해지면
기억은 자연스럽게 흘러가거나, 반대로 더 깊은 상처가 되어 되돌아온다.

 

잊을 수 없음의 서정: 김소월의 '못잊어'

김소월의 시는 이 인간적 모순을 시적 정서로 응축한다.
그는 말한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하지만,

그러나 또 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잊으려는 의지와 잊히는 시간 사이에서,
우리는 흔들린다.
잊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떠오르고,
기억에서 지우려 할수록 마음속은 더 무거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