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처럼 떨어진 시, 류시화의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꽃이라니, 너무 상투적인 은유 아닌가.”
류시화 시인의 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을 구매하며 들었던 첫 생각이다.
그동안 수많은 시인들이 꽃의 액기스를 뽑아내 너무 우려내어 향기조차 나지 않을 것 같았기에,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꽃'이라는 언어에 기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말라버린 꽃처럼, 시는 더 이상 향기를 품지 못할 거라 여겼다.
나는 빛이 바랜 폐허 속에서 길을 잃은 채로 이 시집을 펼쳤다.
상투적인 것을 꺾는 힘
그런데 첫 장을 넘기자마자, 시인은 담박에 나의 우려를 무너뜨렸다.
문제는 꽃이 아니었다.
꽃을 노래하는 방식이었다.
류시화는 상투성을 상쇄하는 힘을 가졌다.
그대의 삶이 시를 잃었을 때
그대가 기억하는 내 시 한 편이
봄을 담고 그대에게 다가가기를
– 시집의 서문 중에서
야구에선 ‘거를 타선이 없다’는 표현이 있다.
이번 시집이 바로 그랬다.
한 편 한 편이 제각기 빛났고, 놓칠 수 없었다.
단일한 색조차도 천 가지로
가난하다고 해도
너는 아주 가난하지는 않다
가령 아무 가진 것이 없이
파란색 하나만 소유하고 있다 해도
그 파란색에는
천 개의 파랑이 들어있다
– 「파란색 가난」 중에서
단 하나의 색조차도 시인의 프리즘을 통과하면 천 개의 파랑으로 살아난다.
그 파랑은 광물을 흰색 자기에 문질렀을 때 드러나는 고유의 줄 빛깔 인 '조흔색(助痕色)' 같다.
보이지 않던 색이 류시화의 프리즘을 통과해 드러난다.
류시화의 시는 상투적인 것을 새롭게 한다.
죽은 것을 살아나게 한다.
그의 시는 마법이다.
그리고 그는 그 마법으로 시인이라는 소명을 다하고 있다.
봄은 시인이다
어린 꽃마다 술 달린 얼굴 가리개 걸어 주고
북두칠성의 국자 기울여 비를 내리고
울대 약한 새들 노래 연습시키고
발목 접질린 철새 엉덩이 때려 떠나게 하고
소리 없이 내린 눈 물소리로 흐르게 하고
– 「봄이 하는 일」 중에서
이쯤 되면 봄은 시인이요,
시인은 봄이다.
그는 동결된 생명에 기척을 주고,
얼어붙은 심장을 뛰게 한다.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외딴 별에 와서
온 존재가 얼어붙어도
온 존재로 심장 세포를 살아 있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이지
– 「알래스카 개구리」 중에서
내 심장도, 겨우내 얼어붙어 있었다.
하지만 시를 읽는 순간, 그것은 다시 뛰었다.
류시화는 언제나처럼 나의 영혼을 깨운다.
그의 시는 영혼을 위한 시니까.
가장 마음에 남은 시: 선운사 동백
마지막으로, 이번 시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시를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선운사 동백
당신과 나
그 사이에
아무도 없던 적이 있었다
오직 붉은 동백만이
모든 꽃은 다음에 피는 꽃에
지는 법
지금은
심장처럼 바닥에 떨어진
붉은 동백만이
당신과 나
그 사이에
심장처럼 바닥에 떨어진 동백.
그 무언의 상처와 붉음 사이로, 사랑이 지나갔다.
모든 꽃은 다음에 피는 꽃에 지는 법.
사랑도 그렇게 진다.
그러나, 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
그게 바로 이 시집이 말해주는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