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응시

말레피센트에서 크루엘라까지, 디즈니는 왜 빌런에 주목했나

돈생휴미 2025. 6. 16. 07:36

디즈니는 왜 빌런을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디즈니의 고전 애니메이션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새롭게 해석한 실사 영화 《말레피센트》는 기존의 공주-왕자 서사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마녀 말레피센트를 중심 인물로 내세운 실험적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안젤리나 졸리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말레피센트라는 캐릭터의 입체성이 맞물리며, 영화는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큰 성공을 거뒀는데요.

이후 디즈니는 이 성공을 이어가듯, 《101마리 달마시안》의 빌런 '크루엘라 드 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크루엘라》를 선보입니다.


크루엘라 역의 엠마 스톤은 기존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더 현대적이고 도발적인 크루엘라를 창조해냈습니다. 원작을 넘는 재창조, 그 자체였습니다.

빌런, 새로운 서사의 주인공이 되다

디즈니 고전의 특징은 분명했습니다. 선과 악의 이분법에 기초해 권선징악이라는 교훈을 전달했죠.


하지만 《말레피센트》와 《크루엘라》는 달랐습니다. 악을 상징하던 인물들이 중심으로 오면서 선악의 경계가 무너졌습니다.

이제 빌런은 더 이상 단순한 악당이 아닙니다. 그들도 상처 입은 존재이며, 자기만의 사연과 내면 서사를 가진 인물입니다. 우리는 때로 그들을 이해하고, 심지어 응원하게 됩니다.


선과 악, 그리고 업보라는 구조

사실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선악이 그렇게 명징하게 갈리는 구조가 아닙니다. 선과 악은 정해진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생성되고 정의됩니다.


누군가를 악이라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레 자신을 선이라 믿게 됩니다. 그렇게 업보의 날카로운 칼날이 서로를 향해 휘둘러지는 것이죠.


크루엘라, 비극의 탈을 쓴 희극

《크루엘라》는 그리스 비극 《엘렉트라》를 떠올리게 하는데요. 출생의 비밀, 복수, 근친살해의 모티프까지 겹칩니다.


하지만 디즈니는 단순히 그 비극을 복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희극적 장치로 재해석해,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의 서사를 쓸 수 있는 여성의 초상을 그려냅니다.


시학의 플롯, 그리고 디즈니의 변형

할리우드 각본가들조차 참고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놀라운 건, 이 고대의 글이 여전히 현대 서사의 뼈대로 쓰인다는 점입니다.

《크루엘라》의 플롯은 얼핏 상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친모를 죽여야 자신이 산다'는 설정에서 주인공이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하고, 그것이 반전의 기제로 작용하는 구조는 《시학》의 비극적 모델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결정적인 지점에서는 디즈니답게 꺾어버립니다.

이것이 디즈니다운 힘입니다. 비극을 희극으로 치환하는 방식, 그 와중에도 감정을 건드리는 서사 연출.


빌런의 광기, 그리고 디즈니의 한계

다만 아쉬움도 있습니다. 크루엘라라는 인물이 가진 광기의 에너지를 디즈니의 프레임 안에서만 표현하다 보니 정돈된 광기, 관리된 위험성에 그쳤다는 느낌도 있죠.

진짜 빌런이 되지 못한 빌런, 혹은 사랑받을 수 있는 악당이라는 안전지대 안에 갇혀 있는 셈입니다.


마무리하며

《말레피센트》와 《크루엘라》는 단순한 빌런 영화가 아닙니다. 디즈니가 고전 서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인물의 이면을 탐구하려는 진화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복잡한 세상, 선과 악, 정의와 업보가 뒤엉킨 현실에 대한 은유가 숨어 있습니다.

디즈니는 어쩌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악당의 이야기에도 진실이 있고, 그 진실은 때로 동화보다 더 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