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응시

불고기를 숙주 삼아 주인 행세하는 숙주 산더미

돈생휴미 2025. 5. 23. 07:02

봄비가 내려 시간이 느려진 주말에, 북한산 자락의 한 음식점에서 경매 회원들을 만났다.

반가운 얼굴들, 서로의 근황을 묻고 메뉴를 고르는데, 비 오는 날 막국수집에서 모이다니, 참 난감했다.

날씨를 예상하지 못한 게 실수라면 실수.

제법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음식이 땡기는 게 인지상정. 우린 막국수와 함께 먹을 불고기를 추가로 주문했다.

짜자잔~ 불고기 등장~

 


푸짐해 보이는 비주얼에 처음엔 와~ 하다가 머릿 속엔 물음표. 보통은 산더미처럼 쌓여야 할 불고기 대신, 숙주 더미가 쌓인 걸 보고 인지부조화가 생겼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

불고기를 숙주 삼아 주인 행세를 하는 숙주가 낯설다.

더구나 문제는 숙주를 불고기와 섞으면서 불판을 벗어나 사방으로 튄다는 것.

유행하는 대로 불고기를 산더미처럼 쌓으면 좋았을텐데.

음식점 사장님은 무언가 차별화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글쎄, 차별화라고 하기엔 잘못 짚었다.

주인공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전략으로 갔어야 했다.

흔하디 흔한 숙주가 불고기를 밑에 깔고 등장하다니.

이건 숙주를 비하하는 게 아닌, 주인공인 불고기의 존재감을 묻어버리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에서도 종종 이런 장면을 마주한다.

겉이 화려한 사람이 실속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말 잘하는 사람이 이치를 아는 사람처럼 군림하기도 한다.

실력은 안 보이고, 포장만 눈에 띄는 세상.
오늘의 식탁처럼, 숙주가 주인 행세를 하는 장면은 어디에나 있다.


나는 지난 겨울, 그런 경험을 실제로 했다.

모임에서 조용히 준비하고 배려했던 사람들의 진심은 묻히고, 목소리 크고 말 많은 사람이 “다 내가 준비했지~” 하며 분위기를 휘어잡는다.

결국 나는 그 모임을 떠났다.

불고기를 덮은 숙주처럼, 본질을 덮어버리는 겉모습과 분위기의 폭력성에 더는 나를 허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불고기와 숙주는 어우러져 맛은 조화롭다.

처음엔 낯설고 불편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숙주는 숨이 죽고,
고기는 풍미를 더했다.

그렇게 우리는 결국,
조금씩 맞춰가고 섞이며 살아간다.

다만 나는 기억하고 싶다.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부차적인지를.

소리보다 진심,
양보다 밀도,
겉보다 중심을.

그래야 내가 사는 삶이
숙주가 아닌, 불고기로 기억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