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력

사랑 이후의 사랑, 노벨문학상 수상자 데렉 월컷의 시 감상

돈생휴미 2025. 6. 6. 10:28

도플갱어와 화해하는 법

열 살 무렵의 막내딸이, 어느 날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뭔지 알아?”

질문이 많은 딸아이에게, 저는 주저 없이 대답했죠.
“글쎄, 귀신?”

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도플갱어.”

도플갱어. 나를 똑같이 복제한 듯한 존재.
겉모습만 똑같은 것이 아니라, 습관과 말투, 눈빛까지 똑같다면… 맞아요. 그건 귀신보다 더 무서울지도 모릅니다.


나와 싸우는 나 - 판타지와 전설 속의 그림자

이영도의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에서 주인공 일행은 자신들과 똑같은 도플갱어들과 힘겨운 전투를 벌입니다. 똑같기에 더욱 치열했고, 더욱 처절했습니다.

우리나라 전래동화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손톱을 함부로 버린 사람의 손톱을 먹은 쥐가 사람으로 변해, 그 사람 행세를 하며 삶을 가로챕니다.

이야기들은 묻습니다.
‘나’와 똑같은 존재가 나타난다면, 나는 그를 이겨낼 수 있을까?


복제의 공포 - 영화와 소설 속 자아의 갈등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프레스티지》에서는 어떤 사물이든 똑같이 복제하는 마술 장치가 등장합니다. 주인공은 그 기계를 이용해 자신을 복제하고, 매번 복제된 자아를 죽이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 반복은 점점 무거운 죄책감과 광기로 이어집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에서는 주인공 개미가 거울 속에서 자신과 마주합니다. 수많은 전투를 견뎌온 자신을 마주보며, 그는 긴장합니다. 거울 속의 ‘나’는 더 단단하고, 더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던 겁니다.

도플갱어는 때로 물리적인 복제체라기보단 ‘내 안의 또 다른 나’입니다. 때로는 감춰둔 두려움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상처이기도 하죠.


너 자신을 맞이하라 - 데렉 월컷의 시처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데렉 월컷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때가 올 것이다.
너의 집 문 앞에
너의 거울 속에 도착한 너 자신을
기쁨으로 맞이할 때가.
미소 지으며 서로를 맞이하게 될 때가.
- 데렉 월컷, '사랑 이후의 사랑'

 

 

사랑은 결국 상처로 끝나는 것.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랑을 찾아나서지만, 그것은 예견된 결말.
종국엔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인은 문 밖에 손님으로 찾아 온 나 자신을 집 안으로 들이라고 하네요.
또 다른 나라고?
내가 그를 피해서 얼마나 멀리 도망쳐 왔는데 그를 맞이하라니.

시인은 도플갱어 같은 나를 내 마음 속에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 괴물같은 나 자신과 화해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으로 인한 상처 쯤이야..
그렇게만 된다면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는 것도 가능할까요.


시는 말합니다.
“네가 외면했던 너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 낯선 이에게 포도주를 주고, 빵을 차려주라.”
그는 다름 아닌, 상처받은 나 자신이니까요.


상처는 감정의 일, 영혼은 여전히 빛난다

류시화는 월컷의 시를 소개하며 이런 문장을 남겼습니다.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왜냐하면 상처받는 것은 감정이지, 영혼은 상처받지 않기 때문이다.
- 류시화,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중


우리의 감정은 아프고 무너질 수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더 큰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에 결국엔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낯선 자아를 집 안으로 들이고, 함께 식탁에 앉아 포도주와 빵을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 같이 들으면 좋은 노래

전인권 – 사랑한 후에

https://youtu.be/AbkLAcFvj58?si=eJcCmDVPL973T1T1

 


이 노래의 가사는 전인권이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후 쓴 곡입니다. “나는 왜 여기 서있나”라는 가사는, 상실과 존재에 대한 물음을 담고 있죠.

“이젠 잊어야만 하는 내 아픈 기억이
별이 되어 반짝이며 나를 흔드네”


이 가사는 마치 데렉 월컷이 말한 “너 자신을 맞이하라”는 시구와 이어집니다. 별처럼 된 기억들, 아픔마저 품고 다시 하루를 살아가는 마음. 그것이 우리가 도플갱어 같은 나 자신과 화해하는 방식 아닐까요.

어두운 새벽 끝에 다시 빛나는 새 별처럼,
당신의 내면도 다시 새로이 떠오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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