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빚, 두 얼굴의 기회 - 부실채권을 다시 생각하다
2016년, 미국의 풍자 프로그램 《Last Week Tonight》. 진행자 존 올리버는 평소처럼 미국 의료 시스템을 비판하다가, 그날은 유독 다른 방식으로 방송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의료채권 1,500만 달러어치를 6만 달러에 샀습니다. 그리고 지금, 전액 탕감하겠습니다."
그 순간 9천 명이 넘는 미국 시민들이 단숨에 빚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단순한 방송이 아니라, 헐값에 거래되는 부실채권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의 족쇄라는 점을 드러낸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이후 이 탕감은 미국의 비영리단체 RIP Medical Debt의 대표적 사례로 기록되며, 사회 전반에 부채와 금융구조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빚은 누구의 잘못인가?
우리는 빚을 개인의 실패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연체자는 무책임하고, 채무자는 무능력하다는 암묵적 낙인이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빚은 개인의 의지보다 큰 사건, 구조적 한계 속에서 발생합니다. 실직, 질병, 예상치 못한 경제 위기 등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빚이 일정 기간 연체되면 '부실채권'이라는 이름으로 금융시장에서 헐값에 거래됩니다. 100만 원짜리 채권도 연체기간이 길고 회수 가능성이 낮을 경우, 채권시장에서 5만 원 이하로 거래되기도 합니다. 부실채권(NPL: Non-Performing Loan)은 일반적으로 3개월 이상 연체된 채권을 의미합니다.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회수가 어렵고, 회계상 손실로 처리되는 대상입니다.
누가 부실채권을 사는가?
대부업체는 부실채권을 수익의 기회로 인식합니다. 이들은 연체된 채권을 저가에 매입한 후, 법정 범위 내의 금리를 적용해 채권을 회수함으로써 수익을 창출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금융기관의 리스크를 외부로 분산시키고, 자산 유동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기도 합니다. 다만 추심 방식이나 금리 수준 등에 따라 사회적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는 정부 주도로 부채 조정과 신용 회복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상은 제한적이며, 복잡한 절차와 까다로운 요건으로 인해 실질적 접근성이 낮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정부가 그리는 새로운 판 - 배드뱅크의 실체
현재 정부는 캠코 산하에 배드뱅크를 설치하고, 새출발기금을 통해 부실채권을 직접 매입·소각하는 구조를 구상 중입니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만기연장 대출 중 50조 원 규모가 올해 9월까지 만기를 맞이하며 위기가 예고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은행권 개인사업자 대출 연체율은 0.71%로 팬데믹 초기보다 악화된 상황입니다.
문제는 기존의 새출발기금과 개인 워크아웃제도가 실효성 측면에서 제한적이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캠코는 30조 원 매입을 계획했지만, 현재까지 5조8천억 원에 그쳤습니다. 정부는 이번에는 보다 과감하게 채무를 정리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세 축 – 캠코, 신복위, 비영리법인의 연합 작전
정부는 이번 채무조정 체계를 세 방향으로 재편하고 있습니다.
캠코(공공기관): 기존 새출발기금을 활용해 부실채권을 매입, 구조조정 또는 소각
신복위(반공공): 워크아웃 프로그램 확대, 직접 탕감 기능도 도입 논의 중
비영리법인(민간): 주빌리은행 모델 부활, 기부 기반의 부실채권 매입 및 탕감 구조 구축
비영리의 가능성 – 다시 주목받는 '주빌리은행'
2015년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이 설계한 주빌리은행 모델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비영리법인이 민간금융기관으로부터 부실채권을 직접 매입하고, 상황에 따라 전액 탕감하거나 조건부 재조정을 진행하는 구조입니다. 기존에는 법적 한계로 인해 별도 대부업체를 통한 우회 방식이었으나, 이번 규정 개정으로 직접 매입이 가능해질 전망입니다.
이 모델은 단순한 부채 감면이 아니라, 회복 가능한 채무자를 선별해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모럴 헤저드: 탕감의 역효과는 존재하는가?
채무 조정이 전방위로 확장될 경우, 반드시 따라붙는 우려가 있습니다. 바로 모럴 헤저드입니다. 정부는 재산 파악 시스템을 활용해 실제 생계형 자영업자 중심으로 대상을 제한하겠다는 입장입니다. 전문가들은 여기에 더해 한 번 탕감받은 이력자 제외, 사업 지속 가능성 판단, 업종 전환 유도 등의 구체적 기준이 필요하다고 조언합니다.
채무 조정은 분명 필요한 제도지만, 무분별한 탕감은 도리어 신용질서를 해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준 설정이 핵심입니다.
해외는 어떻게 하고 있나?
미국: RIP Medical Debt
의료비로 인한 부채를 중심으로 장기 연체 채권을 헐값에 매입한 후 전액 탕감합니다. 2023년까지 100억 달러 이상의 채무를 정리하였으며, 기부 기반의 운영으로 사회적 지지를 받아 확산되고 있습니다.
영국: StepChange
비영리 기구로서 채무자의 소득 상황에 맞춰 채무를 조정하고, 법적 프로그램과 연계해 신용 회복을 돕고 있습니다. 상담 기반의 채무관리 모델로 운영되며, 파산 대신 회복을 유도합니다.
노르웨이: NAV
정부가 직접 개입해 장기 연체자에게 일정 기간 생계비만 남기고 상환토록 한 뒤, 성실 상환 시 나머지 채무를 탕감하는 구조입니다. 복지와 금융 회복이 연계된 제도입니다.
이들 사례의 공통점은 단순한 탕감이 아니라, 경제적 재진입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빚을 어떻게 지울 것인가?
정부는 현재 비영리법인의 채권 직접 매입을 허용하는 규정 개정을 추진 중입니다. 이는 단순한 규제 완화를 넘어, 회복 중심의 사회적 금융 모델을 제도화하는 움직임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탕감은 포기가 아니라, 실패에서 다시 설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정책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이 제도를 어떻게 설계하고 운영하느냐입니다. 선별 조건, 투명성, 재교육. 이 모든 요소가 결합되어야 제도는 살아 움직입니다.
우리 사회는 두 번째 기회가 있는가? 질문을 던질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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